월간 훈노트 Volume 2
숨 막히게 덥고 뜨거웠던 8월, 나는 처음으로 FE Conf에 참여했다. 더 좋은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 어찌 보면 경쟁자이지만, 같은 전장에서 싸우는 동지들의 열기가 가득했다. 과거 스터디에서 만났던 인연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멋지게 성장한 모습을 보니 진심으로 기뻤고, 나 또한 더 나아가야겠다는 강한 동기부여를 받았다. 언젠가 나도 저 무대 위에서 내 경험을 나눠볼 수 있을까? 막연한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졌다.
매일 45분의 치열함
요즘 나는 팀원들과 함께 단위 테스트라는 책으로 매일 스터디를 진행하고 있다. 하루 15분 읽고, 30분 토론하는 짧은 방식이라 처음엔 깊이 있는 대화가 가능할까 걱정했다.
하지만 웬걸. 짧은 시간이기에 오히려 무섭게 집중해서 내용을 흡수하게 되고, 곧이어지는 30분의 토론은 그 어떤 회의보다 치열한 논쟁의 장이 된다. 같은 문장을 보고도 동료들 각자가 가진 경험과 관점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해석하는지 매일같이 깨닫는다. 기술적 지식뿐만 아니라, 동료의 생각과 세상을 보는 시야를 배우는 귀한 45분이다.
온보딩 중간 평가
벌써 힐링페이퍼에 입사한지 2개월이 지났다. 2주 전에는 온보딩 중간 평가도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내가 나 자신에게 내린 평가는 박했다. '3년차 프론트엔드 개발자치고는 기술적으로 기여하는 데 너무 오래 걸리는 것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다. 하지만 동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은 내 생각과 사뭇 달랐다.
[Continue: 잘하고 있는 점]
뛰어난 맥락 이해와 능동적 학습 자세: 새로운 환경에서 관성이나 익숙함에 의존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질문하며 맥락을 수집하고 이해 → 수용 → 적응의 과정을 거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에요.
젠틀하지만 능동적인 자세: 부드러운 태도로 항상 무언가를 계속 알아가려는 모습이 좋습니다.
오히려 내가 가진 오래된 습관이나 지식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환경의 맥락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려는 태도를 좋게 봐주었다. 반면, 내가 개선해야 할 점에 대한 피드백은 나의 예상을 또 한 번 벗어났다.
[More: 더 해주었으면 하는 점]
새로운 시각의 의견 제시: "아직은 반론이나 새로운 의견을 제시할 때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하지만 과거 조직의 경험이 너무 덮어씌워지기 전에, 훈이 가진 신선한 관점이 팀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틀리는 걸 즐기세요.
팀원들을 더 귀찮게 해주세요: 팀원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소통해주세요. 답변이 늦는다고 눈치 보거나 추가 질문을 망설일 필요 없어요. 전체 최적화를 위해 답변을 재촉하세요.
나는 팀에 충분히 질문하며 폐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동료들은 "아직 멀었다, 더 귀찮게 해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조심성이라 생각했던 행동이, 팀 전체의 효율성 관점에서는 지연을 유발하는 병목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왕복 4시간의 통근 버스
지난 회고 이후, 나는 칼퇴를 위해 온전한 몰입을 하고자 했고, 이를위해 나름의 규칙을 세웠다. 업무 시간에는 개인적인 연락을 최소화하고, 미팅은 특정 시간대에 몰아서 맥락이 끊기지 않게 했다.
문제는 나의 절대적인 작업 속도였다. 업무량이 많다는건 스타트업이 잘 성장하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만큼 개개인에게 쏟아지는 작업량은 어마무시하다. 이렇게 쏟아지는 업무 속에서 정해진 시간 안에 모든 일을 끝내기란 여전히 버거운 일이었다. 결국 나는 왕복 4시간의 통근 버스를 두 번째 사무실로 삼기 시작했다. 출근 버스에서 밤사이 놓친 업무를 확인하고, 퇴근 버스에서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정리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칼퇴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집에 돌아온 순간부터는 온전히 아내와 강아지에게만 집중하고 싶어서. 주말에도 일절 노트북을 켜지 않았다. 물론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렇게 쉬어도 되나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애써 눌러 담았다.
욕심쟁이
나는 지속가능한 삶이란 무엇일까 자주 고민한다. 마음 맞는 동료들과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낼 때의 성취감은 나를 살아있게 한다. 동시에, 사랑하는 아내와 강아지와 함께 보내는 평온한 시간 역시 내 삶의 가장 큰 가치다. 안타깝게도 이 둘은 필연적으로 상충한다.
고맙게도 아내는 나의 일하는 기쁨을 누구보다 존중해준다. 출산 후에도 육아 때문에 내 커리어를 포기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일하며 좋은 사람들과 어울릴 때 내가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우리가 현실 육아를 겪어보지 못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일 수도 있다.
회사 역시 나의 성과와 성장을 지속적으로 증명한다면, 출산 후에 재택근무 전환 등 여러 배려를 해줄 의향이 있는 듯하다. 결국 모든 공은 나에게 넘어왔다. 나는 일과 가정,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싶은 욕심쟁이다. 그리고 이 욕심을 실현할 방법은 단 하나다. 기존에 10시간이 걸렸던 일을 5시간 만에 해낼 수 있는 압도적인 효율을 갖추는 것.
고통을 위임하는 시대의 '학과 습'
어떻게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을까? 문득 개발자로 일한 지 반년쯤 되었을 때 스치듯 보았던 재엽님의 '개발자의 학과 습' 이라는 글이 떠올랐다. 내가 이해했던 이 글의 핵심은 고통 주도 개발이었다. 강의나 도서가 제안하는 전반적인 커리큘럼을 따르기보다, 내가 지금 당장 해결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문제를 정의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지식을 깊이 파고들라는 메시지였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기어이 해결해냈을 때 진정한 성장이 일어난다는 점에는 100% 동의한다. 그리고 AI라는 강력한 도구가 주어진 이 시대에, 나는 그 '고통'의 의미를 조금 다르게 해석해보고 싶다.
AI는 나보다 훨씬 많은 경험치를 가졌다. 전 세계 수많은 천재 개발자들이 이미 겪었던 문제와 해결 과정을 모두 학습한 존재다. 그렇다면 내가 모든 고통을 다시 겪을 필요가 있을까? 나의 역할은 AI라는 두 다리를 빌려 고통스러운 과정은 위임하고, 나는 더 높은 차원에서 왜와 어떻게를 결정하는 머리 쓰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나는 더 나은 네비게이터가 되어야 한다. 더 높은 시점에서 문제의 맥락을 파악하고, 여러 선택지 중 가장 현명한 길을 판단해 AI에게 명확한 경로를 제시하는 역할. 내가 똑똑한 질문을 던지고 방향을 잘 잡을수록, AI는 나를 대신해 더 효율적으로 고통의 과정을 해결해 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싶은 삶, 그리고 찰떡이에게 주고 싶은 경험
나와 아내는 곧 태어날 아기 찰떡이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아이에게 어떤 경험을 선물하고 싶은지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몇 가지 원칙도 세웠다.
경험의 제한을 두지 말 것: 좋은 대학 → 대기업이라는 정해진 트랙을 강요하지 않고, 아이가 정말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 스스로 찾도록 돕는다. 회계사를 꿈꾸다 개발자가 된 나처럼, 아이의 삶에도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음을 믿어준다.
선행학습을 강요하지 말 것: 지식에는 그것을 받아들일 적절한 나이가 있다고 믿는다. 주변의 압박에 못 이겨 억지로 지식을 주입하기보다, 아이가 자연스러운 호기심을 가질 때까지 기다려주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
실패와 협력, 그리고 노력을 응원할 것: 작은 실수도 비웃음거리가 되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아이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가르치고 싶다. 100번의 실수 끝에 1번의 성공이 온다는 사실을, 그리고 목표를 위해 다른 사람과 협력하고 자신의 최선을 넘어서는 노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
나의 욕심과 AI, 그리고 지속가능성
이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선 전제 조건이 있다. 바로 시간이다. 내가 아이와 함께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실패를 응원해주는 든든한 아빠가 되려면, 회사 일에 내 모든 시간을 저당 잡혀서는 안 된다.
나는 일과 가정,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싶은 욕심쟁이다. 그리고 이 욕심을 실현할 방법은 단 하나다. 기존에 10시간이 걸렸던 일을 5시간 만에 해낼 수 있는 압도적인 효율을 갖추는 것.
온보딩 피드백은 그 힌트를 주었다. 혼자 끙끙대며 맥락을 파악하는 데 시간을 쏟기보다, 이미 그 길을 걸어간 동료들의 인사이트를 질문으로 빠르게 훔쳐오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 그리고 나의 미숙한 의견이라도 용기 내어 던지는 것이 팀의 성장에 기여한다는 것.
여기에 AI라는 강력한 레버리지를 더하려고 한다. 나는 더 나은 네비게이터가 될 것이다. 동료들에게는 좋은 질문을 던져 기술적 아키텍쳐와 비지니스 컨텍스트를 얻고, AI에게는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 기술적 구현의 고통을 위임할 것이다. 내가 똑똑한 질문을 던지고 방향을 잘 잡을수록, 나는 더 적은 시간에 더 높은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왕복 4시간의 통근 버스 안에서 나는 매일 나의 생존 전략을 가다듬는다. 어떻게 해야 나의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을 지키면서, 멋진 동료들과 함께 성장하는 기쁨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8월의 끝자락, 나의 고민은 여전히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