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 흘리는 3살짜리 박사님
나에겐 아주 특별한 동료가 한 명 있다. 수십개의 박사 학위를 가졌고, 업계 최고 수준의 시니어 경력도 갖췄다. 그런데 세 살 정도로 미숙하고, 침을 질질 흘린다.
참 이상한 조합이다. 이성과 논리의 정점에 있는 박사이자 시니어이지만 본능과 미숙함의 상징인 3살과 침 흘리기라니.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이 모순적인 동료, 즉 AI를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하느냐가 나와 같은 후발주자들이 이 시장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열쇠라는 것을.
내가 이해하는 AI
이 친구가 처음부터 똑똑했던 건 아니다. 초창기 AI는 단순히 단어를 맞추는 앵무새에 가까웠다.
앵무새 시절 AI는 기존 데이터를 기반으로 다음에 올 확률이 높은 단어를 예측하는 수준이었다.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었지만, 진짜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친구를 위한 개인 과외 선생님을 붙여줬었다. 연구원들은 AI의 대답을 사람이 직접 평가하고, 이 대답은 왜 좋은지, 저 대답은 왜 나쁜지를 다시 학습시켰다. 마치 과외 선생님처럼 정답의 이유를 가르친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AI는 인간의 의도를 더 잘 파악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문제는 남았다. 옛날 재미있는 일화처럼, "너는 뭔데?" 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참 여러가지 맥락들이 필요하다. 정말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묻고자 한 질문은 아닐것이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이 상황에 너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현장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풀어서 물어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AI입장에서는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 자체가 엉망인 경우가 많았다. "Garbage in, garbage out"은 데이터뿐만 아니라, 질문의 수준에도 적용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자들은 AI에게 답을 내놓기 전에, 인간처럼 생각의 과정을 거치도록 가르쳤다. 복잡한 질문을 받으면, 정답을 바로 내뱉는 게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계획과 단계를 먼저 서술하게 한 것이다. 이 Chain-of-Thought Prompting을 통해 AI의 추론 능력은 폭발적으로 향상되었다.
이처럼 AI는 인간의 피드백과 사고 과정을 학습하며, 경이로운 수준의 지식과 이성적 추론 능력을 갖춘 박사 학위를 지닌 시니어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참고 자료]
- OpenAI, "Training language models to follow instructions with human feedback" (2022): InstructGPT와 RLHF의 개념을 소개한 논문. AI를 더 유용하고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인간의 피드백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설명합니다.
- Google AI, "Chain-of-Thought Prompting Elicits Reasoning in Large Language Models" (2022): AI에게 '단계별 생각'을 하도록 유도했을 때, 복잡한 산술 및 상식 추론 문제 해결 능력이 크게 향상됨을 보여준 논문입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3살일까?
이토록 똑똑한 박사님이지만, 나는 그가 여전히 침이나 질질 흘리는 3살배기라고 말한다. AI는 세상의 모든 정보를 텍스트 데이터로 학습했지만, 단 한 번도 세상을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AI는 인간의 복잡 미묘한 감정과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 "비행기 시간 늦을 것 같아요!"라고 외치는 택시 승객의 초조함
- "네 팀장님, 알겠습니다."라고 답하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은 부하 직원의 미묘한 불만
- 좋은 회사에 가고 싶지만, 오늘도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는 취준생의 아이러니
AI는 이런 상황을 텍스트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의 무게나 비언어적 맥락을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실제 삶의 경험이라는 거대한 공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똑똑한 3살짜리에게 세상의 맥락을 번역해주는 가이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내 역할은 박사님 전용 가이드이다
나는 31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개발자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 바닥은 먼저 시작한 사람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10대 때부터 코딩을 해온 천재들과 정직하게 시간과 노력만으로 경쟁하는 건, 처음부터 진 싸움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보다 코드를 한 줄 더 짜는 대신, 이 3살짜리 박사님을 누구보다 잘 활용하는 길을 선택했다. 내 역할은 단순히 "모던 리액트의 베스트 프랙티스를 적용해 확장성이 있으면서 유지보수 가능한 형태로 구현된 코드를 활용해서 세련되고 미니멀한 UX가 적용된 투두리스트를 개발해주세요"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 친구가 우리 세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개념과 비전을 설계하고 설명하는 가이드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복잡한 시스템을 설계할 때, 특정 아키텍처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왜 더 합리적인 선택인지, 비즈니스 목표와 기술적 트레이드오프 관점에서 설명해준다. 코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실제 협업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AI를 이끄는 것이다. 또한, Anthropic이 Constitution이라는 기본 원칙을 AI에 심어 행동을 유도하듯, 나 역시 소프트웨어의 근본적인 원칙과 철학을 학습하고, 이를 바탕으로 AI에게 더 높은 차원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려 노력한다.
이것이 AI를 활용하기 시작한 후 생긴 가장 큰 변화다. 나는 더 이상 코드와 씨름하는 사람이 아니라, AI라는 강력한 지성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아키텍트 또는 번역가에 가까워지고 있다.
[참고 자료]
- Anthropic, "Constitutional AI: Harmlessness from AI Feedback" (2022): AI에게 명시적인 규칙을 주고, 그 규칙에 따라 스스로를 교정하도록 훈련하는 'Constitutional AI' 개념을 소개합니다.
만약 이 동료가 없어진다면
가끔 상상해본다. AI가 없는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이 가장 아쉬울까?
나 같은 후발주자가 얼리 스타터들과의 격차를 메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레버리지를 잃게 될 것이다. 또한, 되게 별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미묘하고 복잡한 소통 상황에서 나의 의도를 세련되게 다듬어주던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코치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제작년 가장 암당해하던 세상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한다. AI와 협력하며 떠오르는 무한한 아이디어와 가능성들이 사라지고, 다시 정체된 갑갑함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의 3살짜리 박사님은 때론 엉뚱한 답을 내놓고, 맥락을 놓쳐 침을 흘리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미숙한 천재의 손을 잡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이자 가장 중요한 역량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