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더하기

"가볍고 초기적인 형태라도 의견을 제시해 주세요."

온보딩을 마치며 동료에게 받은 피드백 중,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문장이다. 나는 새로운 팀에 잘 녹아들기 위해 그들의 문화를 빠르게 흡수하고, 내 색깔을 잠시 감추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먼저 이 팀의 문화와 아이디어를 습득한 후 기여를 시작하는게 중요하다 생각했기 떄문이다. 하지만 동료들이 내게 원했던 것은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감점당하지 않으려는 삶

돌이켜보면 나는 잘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동시에 질투도 많았다. 누군가 멋진 연주를 하거나 어려운 문제를 척척 풀어내는 모습을 보면 부러움을 넘어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욕심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욕심에 비해 용기가 부족했다. 클라리넷에 재능을 보여 서울 어린이 시립악단에 들어갔지만, 엄격한 분위기와 압박감이 무서워 금방 포기했다. 미국 유학을 하면서도 여러 모임과 다양한 기회가 주여졌을 땐, 이동수단이 마땅치 않아서 그리고 아직 준비가 덜 된것 같아서라는 핑계로 도망쳤다. 잘하고 싶었지만, 실패해서 감점당하는 게 더 두려웠던 것 같다.

개발자가 되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면서 그런 모습은 많이 변했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배우는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꼈고, 나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내면을 가다듬을 수 있었으며, 좋은 동료들과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가는 기쁨을 알게 됐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실수하면 안 된다는 방어적인 내가 남아있었다.

가장 큰 오해

이번에 새로 합류한 팀은 모두가 뛰어난 사람들이다. 나는 자연스레 다시 움츠러들었다. 사람들과 으쌰으쌰하며 시너지를 만드는 것이 내 강점이라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그런 모습을 숨기려 했다. 혹시나 내가 팀의 속도를 늦추거나, 잘못된 의견으로 흐름을 방해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모든 것을 이해하고, 완벽하게 정리된 질문만 던지고, 충분한 확신이 설 때까지 내 의견을 아꼈다. 이것이 팀을 위한 나의 최선이자 최고의 배려라고 믿었다.

하지만 온보딩 피드백은 내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알려주었다.

"훈, 팀원들을 더 귀찮게 해주세요. 완벽하게 정리된 질문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과거 조직의 맥락이 너무 덮어씌워지기 전에, 지금 느끼는 신선한 관점을 더 많이 공유해주세요."

내가 배려라고 생각했던 행동이, 사실은 팀 전체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병목이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나는 팀에 녹아들기 위해 내 색깔을 빼고 있었지만, 팀은 오히려 나의 다른 경험과 시각이 더해져 새로운 색이 만들어지길 기대하고 있었다.

점수가 아닌, 방향키

한 동료가 "틀리는 걸 즐기세요"라는 말을 건넸을 때, 처음엔 조금 무책임하게 들렸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진짜 무책임한 것은 실패가 두려워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태도라는 것을. 실수를 하지 않는 것만이 목표인 삶에 무슨 성장이 있을까.

그제야 나는 팀에 어떤 가치를 더할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했다. 감점당하지 않기 위해 60점짜리 안전한 답만 내놓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틀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40점짜리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고민의 답은 동료들이 준 구체적인 제안 속에 있었다.

"새로운 도메인과 소프트웨어를 연결하는 지식을 훈만의 방식으로 정리해주면 어떨까요?"

"코드 레벨에 숨겨진 맥락을 파악해서, 새로 올 동료들이나 에이전트(AI)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코드 철학과 구조를 함께 만들어가요."

이건 단순히 나 개인의 성장을 넘어, 팀 동료와 미래의 온보더들, 심지어 AI까지도 도울 수 있는 - 즉 흔히들 말하는 - 야영지를 가꾸는 작업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추구했던 완벽한 개인의 성과보다, 조금 불완전하더라도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가치를 만드는 일이 훨씬 의미 있게 다가왔다.

아빠가 될 준비

오는 12월이면 나는 아빠가 된다. 곧 태어날 아이에게 어떤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까. 실수하지 않는 완벽한 아빠? 아니면 조금 서툴러도 함께 넘어지고 배우며 성장하는 아빠? 답은 명확하다.

9월 한 달간의 고민은 나를 새로운 출발선에 세웠다. 점수에 연연하지 말자. 그 대신 올바른 방향을 향해 매일 한 걸음씩 내딛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 혼자만이 아닌,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자.

완벽한 60점보다는, 실수투성이지만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40점짜리 용기를 선택하자.